퇴직연금, 그거 회사가 알아서 해주는 거 아니었나요
직장 생활 처음 시작할 때 인사팀에서 서류 한 묶음을 내밀었습니다. 그 안에 '퇴직연금 유형 선택'이라는 항목이 있었는데, 솔직히 뭔 소리인지 하나도 몰랐습니다. DB? DC? 알파벳 두 글자가 적혀 있길래 "아무거나요"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납니다.
증권사에 입사하고 나서야 그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깨달았습니다. 사내에서 퇴직연금 세미나를 열었는데, 같은 해에 입사한 동기 두 명의 퇴직금 예상액이 수백만 원 차이가 나는 시뮬레이션을 본 적이 있거든요. 둘 다 같은 연봉이었는데 말이죠.
DB형은 '회사가 굴리고', DC형은 '내가 굴린다'
아주 단순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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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형(확정급여형): 퇴직할 때 받을 금액이 미리 정해져 있는 구조입니다. 퇴직 직전 3개월 평균 임금 × 근속연수로 계산되니, 연봉이 꾸준히 오르는 사람에게 유리하죠. 운용은 회사가 합니다. 내가 신경 쓸 건 없는 대신, 투자 수익이 아무리 좋아도 나와는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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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형(확정기여형): 회사가 매년 내 연봉의 1/12 이상을 적립해주고, 그 돈을 내가 직접 운용합니다. 예금에 넣을 수도 있고, 펀드나 ETF에 투자할 수도 있어요. 운용 결과에 따라 퇴직금이 불어날 수도, 쪼그라들 수도 있는 구조입니다.
쉽게 비유하면, DB형은 식당에서 정해진 정식을 받는 것이고, DC형은 뷔페에서 내가 직접 접시를 채우는 것과 비슷합니다.
증권사 시절, 선배의 한마디가 머리에 박혔다
입사 3년 차쯤 되었을 때, 리서치센터 선배 한 분이 DC형으로 전환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연봉이 더 크게 오를 자신이 없어. 그럴 바엔 내가 직접 굴려서 수익을 내는 게 낫지."
반대로 영업부 에이스였던 다른 선배는 DB형을 고수했는데, 이유가 명확했습니다. 매년 성과급이 연봉에 반영돼서 퇴직 직전 연봉이 크게 뛸 가능성이 높았거든요. DB형은 마지막 연봉 기준이니까, 승진과 연봉 인상이 가파른 사람일수록 유리한 셈이죠.
그때 깨달은 게 있습니다. 퇴직연금 유형 선택은 '어떤 게 좋냐'의 문제가 아니라 '내 커리어가 어떤 궤적을 그릴 것 같은가'에 대한 판단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나는 어떤 걸 골라야 할까
몇 가지 기준을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DB형이 유리한 경우
- 연봉이 꾸준히 우상향할 것으로 예상되는 직장
- 승진 가능성이 높고, 장기 근속할 계획이 있을 때
- 투자에 관심이 없거나, 직접 운용할 자신이 없을 때
DC형이 유리한 경우
- 연봉 인상 폭이 크지 않거나, 이직이 잦은 편일 때
- 투자에 어느 정도 지식이 있고, 직접 운용할 의향이 있을 때
- 중소기업 등 회사의 재무 안정성이 걱정될 때 (DB형은 회사가 망하면 퇴직금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요즘처럼 이직이 자연스러운 시대에는, DC형의 장점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이직할 때 퇴직연금을 IRP 계좌로 깔끔하게 옮길 수 있어서 연금 자산이 끊기지 않고 이어진다는 점이죠.
DC형을 골랐다면, 방치하지 말 것
DC형의 가장 큰 함정은 '선택만 하고 방치하는 것'입니다. 금융감독원 통계를 보면 DC형 가입자의 상당수가 원리금보장형 상품, 그러니까 사실상 예금에만 돈을 넣어두고 있습니다. 연 2-3%짜리 예금에 10년, 20년을 넣어두면 물가 상승률을 간신히 따라가는 수준밖에 안 됩니다.
DC형을 선택한 이상, 최소한 분기에 한 번은 내 퇴직연금 계좌에 들어가서 운용 현황을 확인하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TDF(타깃데이트펀드)처럼 은퇴 시점에 맞춰 자동으로 자산 배분을 조절해주는 상품도 있으니, 투자가 어렵게 느껴진다면 이런 상품부터 살펴보는 것도 방법이에요.
퇴직금은 '나중의 돈'이 아니라 '지금 결정하는 돈'
저도 증권사를 나오면서 퇴직금을 받았는데, 그 금액을 보고 "7년 동안 이것밖에 안 됐나" 싶어서 좀 허탈했습니다. 물론 당시 DC형으로 바꾸지 않은 제 선택 탓도 있었고요.
퇴직연금은 당장 손에 잡히는 돈이 아니다 보니 관심이 밀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20-30년 뒤의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금융 결정 중 하나라는 건 분명합니다. 이번 주말, 회사 인트라넷이든 퇴직연금 운용사 앱이든 한번 들어가보시길 권합니다. 내 퇴직연금이 DB인지 DC인지, 지금 어디에 투자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첫걸음이 될 겁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공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한 것이며, 특정 금융 상품에 대한 투자 권유가 아닙니다. 퇴직연금 유형 변경은 회사 규정과 개인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니, 중요한 결정 전에는 반드시 전문가 상담을 받아보시기 바랍니다.